Post by (@_inyeon)

last month

_ 건축가를 <남의 공간을 짓기로 업 삼은 자>라고 정의내린다면, 긴긴 이론끝, 이제 '실제와 현실'에 다다른 나의 삶은 앞으로 영원히, 끝없는 타자화의 과정일 것이다. <끝없는 자기의 타자화>! <남이 되기>! <남의 먹고 자고 누고 싸는 공간을 상상하는 삶>!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 삶인가. 근데 그 고독이 무기되는 삶. 건축가라는 업. 내가 택한 업. 그 업을 내 삶 전반에 기워넣는 과정의 연속으로 오늘도 또 창덕궁에 왔다. _ 창덕궁 전체를 통틀어 오후 햇살이 가장 길게 내리쬐는 여기 대조전 뒷마당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. 옛 왕비의 침전 뒷마당. 그리고 저기 높디 높은 담장 뒤, 비밀의 화원으로 통하는 '왕비만의 비밀계단'. 가장 비밀스럽고 농밀한 공간이 갖는 공간적 신비. 대조전 화계의 이 '비밀계단'을 걸어올라가 문을 열고 싶은 충동은 지난 수 년간 나를 얼마나 충동질했는가. 문틈 사이만이라도, 저 화계 뒤의 별세계를 볼 수 있다면, 다른 감각의 차원으로 나를 데려갈 것만 같은 신비가 있다. _ 헤드셋으로 바깥사람들과의 진공을 채우고 grieg의 바이올린곡을 튼다. 그리곤 책을 펼치고 우려내온 자스민차를 마신다. 이 곳, 이 장소의 신비가 애워싸듯, 자스민 향이 코에 부드럽게 접촉한다. 문장들을 곱씹어 읽으면서 이 풍경, 이 공간감을 또한 음미한다. 동시에 500년 스승 박자청 선생에게 자기인식의 회개를 고한다. — 우리 민족건축의 큰 스승이시여, 이 어린양을 앞으로 좀 잘 인도해주십시오. _ 그때 저 화계 끝 문이 열리고, 스승이 걸어내려온다. 비밀스런 설계도를 내게 건낸다. 이걸 죽을 때까지 어디 한번 잘 다뤄보라고, 재미붙여보시게나—한다. 감각의 차원, 인간 감각의 식별력을 날카롭게 할 것. 문장에 자스민차를 적셔 마실때의 촉감과 향, 햇살이 구름에 가려지고 들춰질 때 호흡을 달리하는 빛무리의 변화무쌍함을 느끼는 것, 또 그것이 공간의 명묵을 달리할 때만들어내는 질감을 기억하는것... 박자청은 영조가 끝난 이후엔 한번도, 단 한 번도 발딛지 못했을 왕비의 공간. 이렇게 훌륭한 '타인의 공간'을 만들어낸 박자청 선생께 존경을 표한다. 아뭏튼 이 생각들은 삶과 노동의 균형은 어떻게 이뤄지는가, 혹은, 삶의 이유 따위에 대해 생각하면서 오늘 내가 잠긴 백일몽의 내용이다.

35 likes

3 comments